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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3500억 달러, 우리 돈 약 490조원을 '현금으로 선납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단순한 외교적 수사(修辭)가 아니라, 한국 경제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중대 사안이다. 만약 우리가 이 요구를 곧이곧대로 수용한다면 외환시장은 단숨에 불안에 휩싸일 수 있다.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넘어섰고, 일부에서는 1600원 돌파 가능성까지 거론한다. 외환보유액과 금융 안정, 기업의 투자 여력, 가계부채까지 감안하면 '현금 일시불' 방식은 우리의 선택지가 아니다. 협상은 격정이 아니라 구조의 언어로 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주고받아야 하는가.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갤럭시탭이벤트
것은 돈 그 자체가 아니라 '안심할 수 있는 반도체 공급망'임을 간파해야 한다. 오늘의 논점을 40여 년 전 한 기업인의 결단으로 되돌려보자. 1983년 2월8일,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도쿄에서 이른바 '2·8 도쿄선언'을 통해 "반도체야말로 21세기의 쌀"이라고 선언했다. 당시 한국은 가난했고, 기술·자본·인재 어느 것 하나 충분치 않았다. "삼성이K채널
반도체를 한다는 것은 무모한 도박"이라는 조롱 속에서 그는 64K D램 개발을 목표로 사람과 돈을 과감히 투입했다. 그 결단이 256K, 1M, 4M, 16M으로 이어졌고, 10년 만인 1993년 대한민국은 마침내 세계 메모리 1위 국가에 올랐다. 한 개인의 선택과 결단이 국가의 진로를 바꾼 것이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핵무기보다 무서운 반도체'는 단순옵션
한 레토릭이 아니라, 산업과 안보의 현실이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8월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핵무기보다 무서운 반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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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계 반도체의 병목은 HBM(고대역폭메모리)이다. AI 가속기, 클라우드, 자율주행, 초정밀 국방체계까지 HBM과 서버 DRAM, 파운드리 칩이 동맥처럼 흐르지 않으면 멈춘다. 기술은 인간의 본능을 좇는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은 2005년 출간한 그의 대표 저서 《특이점이 온다(The Singularity is Near)과매도
》에서 기술이 인간 지능을 추월해 사회·문명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시점을 2045년으로 예측했다. 그는 2025년 즉, 올해 3월 그 특이점의 시기가 2030년으로 당겨질 수도 있음을 개정판에서 재예측했다. 우리가 직시해야 할 지점은 세계 반도체의 병목이 앞으로 5년간 최고조에 달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쥐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메모리 분야에서 독보적 경쟁력을 갖고 있고, 첨단 패키징 역량도 빠르게 확장하고 있다. 대만의 파운드리, 일본의 소재·장비, 미국의 설계·수요와 더불어 한국의 메모리와 패키징이 결합되어야만 비로소 '완성된 공급망'이 된다. 이 균형을 이해하는 순간, 3500억 달러 현금 요구의 본질이 보인다. 미국은 비용을 선납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 없이 공급되는 칩을 원한다. 한국은 여기에 답할 수 있다. 돈이 아니라 칩의 언어, 일시불이 아니라 이행과 검증의 언어로 테이블을 바꾸면 된다.
해법은 분명하다.
첫째, 장기공급약정(LSA)과 단계적 관세 감면의 교환이다.
HBM·서버 DRAM·첨단 패키징 물량을 일정 기간 미국 우선으로 배정하고, 그 이행 실적에 비례해 관세를 단계적으로 인하하거나 환급하도록 계약화한다. 정치·법률 환경이 바뀌더라도 자동으로 조정되는 스냅백(snap‑back), 클로백(claw‑back) 조항을 넣어 불확실성을 줄인다. 이 구조에서는 '현금 쇼크' 없는 신뢰가 쌓인다.
둘째, '타리프‑포‑텍(Tariff‑for‑Tech)', 즉 관세 감면과 기술·설비·역량의 미국 내 이전·공유를 맞교환하는 모델이다.
미국 본토에 첨단 패키징(CoWoS, FO‑PLP 등)과 신뢰성 인증 라인을 증설하고, 국방·우주 규격을 함께 정비하며, 공동 R&D센터를 통해 차세대 메모리와 패키징 표준을 만든다. 이는 '돈가방'이 아니라 공급망 자본을 주고받는 방식이므로, 양측 국민에게 설명이 가능하다.
셋째, 동맹형 반도체 비축체계(Strategic Chips Reserve)를 제안하자.
방산·핵심 인프라용 HBM과 서버 DRAM을 동맹국이 공동 비축·운용하고, 평시에는 회전율을 통해 비용을 낮춘다. 위기 시에는 비축 방출이 관세보다 강력한 안전판이 된다. 한국 기업은 이 체계의 운영 주체로 참여할 수 있다.
넷째, 3500억 달러의 '가치'를 현금이 아닌 '구조화 투자'로 분할 이행하자.
현금·지분·대출·보증을 혼합한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민관 합작 펀드, 수출신용, 세액공제 등을 활용해 시간에 따른 가치 제공을 설계한다. 미국은 가시적인 설비와 고용, 기술 축적을 얻고, 한국은 외환·금융 안정을 지키며 실물 협력을 확정한다.
다섯째, 금융안전판을 병행하자.
관세 협상과 별개로 한미 간 유동성 백스톱과 통화스와프 라인에 대해 제도적 대화를 시작하면 시장의 과민반응을 완화할 수 있다. 협상장은 정치의 무대가 아니라 리스크 관리의 현장이다.
대만·일본·유럽과의 연대도 주도해야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프레임 전환이다. "돈을 내라, 못 낸다"의 공방을 벗어나, 공급망 안정과 안보 기여를 어떻게 계량화해 서로에게 가치를 줄 것이냐의 논리로 옮겨야 한다. 대만·일본·유럽도 각자의 부담을 안고 있다. 한국이 주도적으로 연대의 플랫폼을 설계하면 미국도 합리의 자석에 끌려올 것이다. 우리가 요구할 것은 거창한 특혜가 아니다. 투명한 이행, 상호 검증, 위험의 공정한 분담이다. 그 언어로 말하면 관세는 경사로 바뀐다.
나는 야당 정치인이지만, 이 문제만큼은 정쟁의 언어로 말하고 싶지 않다. 1983년 '2·8 도쿄선언'이 기업의 결단을 넘어 국가의 결단이 되었듯,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가 아닌 기술의 결심이다. 이재명 정부가 '현금이 아닌 칩의 언어, 일시불이 아닌 단계의 언어, 구호가 아닌 계약 조항'으로 협상을 전환한다면, 한국은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 정부와 국회, 산업계가 한 팀이 되어 장기공급‑관세 감면 패키지, 타리프‑포‑텍, 동맹형 비축, 구조화 투자, 금융안전판을 일괄 패키지로 설계하자.
국민께도 분명히 말씀드린다. 공포는 빠르고 상상력은 과장되기 쉽다. 진짜 비싼 것은 '지금 돈'이 아니라 나중의 불확실성이다. 불확실성을 흡수하는 조항 하나하나가 곧 국익이다. 반도체는 도시를 파괴하지 않는다. 대신 국가의 운명, 경제의 지형, 동맹의 질서를 바꾼다. 핵보다 무서운 반도체, 그 지렛대를 쥔 나라는 한국이다. 이제 그 힘을 냉정하고도 담대하게 사용할 차례다.  



양향자 국민의힘 반도체AI첨단산업특위 위원장·전 삼성전자 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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